2008년 12월 18일
위클리프 그리고 후스와 제롬
- 폭스의 순교사 중
존 위클리프의 생애와 박해
"개혁의 샛별"로 불리는 개혁주의자 위클리프는 에드워드 2세 때인 약 1324년 경에 태어났다. 그는 옥스포드 퀸즈 대학을 다녔다. 그 대학은 그 기간에 퀸 필리피의 고해 신부인 로버트 이글스필드에 의해 세워졌으나, 이 학교에서 그가 기대했던 만큼 공부의 도움을 얻지 못하자 모튼 대학으로 다시 옮겼다.
대중이 처음으로 그에게 주의를 기울인 사건은 그가 구걸하는 탁발 수도사들에 대항해서 대학을 변호한 것이었다. 1230년 옥스퍼드에 정착한 이후로 그 때 당시 수도사들은 대학에 큰 골치 거리였고, 그들과 계속해서 불화가 있었다. 수도사들은 교황에게 호소했고 학자들은 민권에 호소했다. 때로는 이편이, 때로는 저편이 우세했다. 탁발 수도사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평범한 거지였으며, 구걸은 복음 단체에서 나온 것이라는 개념을 선호했다. 그들은 강단과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이런 교리를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그들의 삶이 게으른 것으로 인해 이 종교적인 탁발 수도사들을 경멸했으며, 이런 사실을 폭로할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이런 구걸을 대항해서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들을 비난하고 그들이 종교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도 수치거리임을 증명했다. 대학당국은 그를 대학의 첫 번째 투사들 중의 하나로 여겼고 그는 곧 발리올 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이 즈음 이스립 대주교가 켄터베리 홀을 설립했는데 거기에 한 명의 관리인과 열 한 명의 학장을 두게 되었으며, 이 관리직에 위클리프가 뽑혔다. 그러나 주교가 죽자 그 자리는 엘리의 주교 스테펜 랭함으로 대체되었다. 그 일에서 상당한 불이익을 당한 위클리프는 교황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교황은 결국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에게 반대했다. 그때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가 존 왕 때부터 교황에게 지불되어 왔던 종교세를 철회했다는 것이다. 교황은 협박을 했고 에드워드는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존 왕이 불법을 행했으며 국가의 권리를 포기했다고 결정하고 어떠한 결과가 따르든지 항복하지 말라고 왕에게 충고했다.
성직자 층은 즉시 교황을 변론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한 학식 있는 수도사는 그럴싸하고 힘찬 논문을 발표했고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나쁜 명분이 그렇게도 잘 변호되는 것을 보고 분노한 위클리프는 그 수도사에게 맞서서 매우 훌륭한 방법으로 그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게 했다. 로마에 대한 그의 고소로 그는 곧 적대시되었다. 참으로 중요한 시기에 그는 교황에게 반대했으며, 그는 로마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위클리프는 나중에 신학교수의 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는 로마 교회의 오류들과 수도사들의 타락을 완전히 인식하고 그것들을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공공 강연에서 그는 그들의 악을 비난하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반대했다. 그는 미신으로 덮여진 수많은 폐해를 드러냈다. 처음에는 대중의 편견을 풀어나가기 시작했고, 차츰 나아가서는 그 시대의 형이상학적인 논문들과 종교적인 소설을 사용하여 그의 의견을 나타냈다. 로마 법정의 강탈이 그가 즐겨 쓰는 주제였다. 이런 것들에 대해 그는 신랄하고도 장황하게 상술하면서 논리적 사고를 합류시켰다. 이것은 곧 성직자들 사이에 논란을 야기시켰으며, 그들은 위클리프에게서 캔터베리 주교직과 관직을 박탈했다.
이번에는 랭카스터 공작이 그 일을 처리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는 가운트의 존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이 공작은 종교에 있어서 매우 자유로운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성직자들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법정의 부당한 요구들이 매우 부담스럽게 여겨졌던 차에 그는 뱅거의 주교와 위클리프를 보내어 이런 폐해들에 대해 항의하기로 결심했다. 또한 교황은 영국 교회에 속한 어떤 교회 수입도 더 이상 처리할 수 없도록 결의되어졌다. 이러한 사명을 띠고 위클리프는 주의 깊게 로마 체제와 정책에 들어갔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로마의 탐욕과 욕망을 폭로하기로 결심하고서 돌아왔다.
그의 전 위치를 회복한 위클리프는 그의 강의에서 교황의 횡령과 그의 무오성과 그의 자존심과 그의 허욕과 그의 전제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이름붙인 첫 번째 인물이었다. 교황에 이어 그는 주교들의 겉치레와 사치스런 옷차림 등에 대해서도 비평하였다. 그들의 미신과 속임수는 그가 지성과 논리적 명확성을 가지고 말했던 주제들이었다.
랭카스터 공작의 보호 하에 위클리프는 좋은 보수를 받았으나 그가 그의 교구에 정착하자마자 그의 적들과 주교들이 새로운 힘으로 그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3세가 죽은 후에 그의 손자 리차드 2세가 열 한 살의 나이에 그 뒤를 이었다. 랭카스터 공작은 그가 기대했던 대로 하나뿐인 대리인 자리를 얻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의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위클리프의 적들은 이런 환경을 이용해서 그를 대항하여 고소의 목록들을 새롭게 작성했다. 결국 교황이 왕과 몇몇 주교들에게 교서를 보냈으나 섭정자와 국민은 교황의 오만함에 경멸을 표했다. 그때 당시 교황은 예상되는 프랑스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돈이 부족함으로 인해 상당한 돈을 충당해 줄 것을 제안했고, 교황이 쓰기 위해 돈은 징수되어졌다. 이 문제가 위클리프의 결정에 맡겨졌다. 그러나 주교들은 교황의 권위로 지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위클리프를 재판에 회부할 것을 주장했고 실제로 그는 람베스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 때 밖에서 민중이 일으킨 소동과 궁정 신사인 레위스 클리포트 경의 명령에 겁을 먹은 그들은 명확하게 형을 집행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황에게 불쾌한 교리들을 설교하지 말라고 위클리프에게 금지 명령을 내림으로써 전체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러나 우리의 개혁주의자에게 이것은 웃음거리 밖에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맨발로 돌아 다니며 긴 프리즈 가운을 입고 전보다 더 열렬히 설교했기 때문이다.
1378년에 이반 6세와 무시무시한 교황이며 '하나님의 대리자'로 자처했던 클레멘트 7세 사이에 경쟁이 일어났다. 이 때가 위클리프의 재능을 발휘할 호기였다. 그는 곧 교황권에 반대하는 소책자를 만들어 냈는데 그것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열렬히 읽혀졌다.
그 해 말에 위클리프는 폭력적인 무질서에 사로잡혔다. 구걸하는 탁발 수도사들이 가장 적대심이 강한 옥스포드의 시민들 중 4명을 동반하고 그의 침실로 들어와, 목숨을 부지하려면 그가 주장했던 부당한 것을 철회하라고 그를 다그쳤다. 위클리프는 이 엄숙한 전갈에 놀랐으나 침대에서 일어나 확고한 태도로 응답했다. "나는 죽지 않겠소, 대신 살아서 수도사들의 악행을 알리겠소."
위클리프가 회복됐을 때, 그는 가장 중요한 일을 시작했다. 즉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하기 전에 그는 이 일의 필요성을 담은 소책자를 만들었다. 성경을 억압하는 주교들이 열심히 그것을 샀으며 복사본을 구입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특별한 복음서나 서신서들을 베낀 것을 입수했다. 나중에 롤라드(위클리프파 그리스도인들)가 증가되었을 때, 이런 성경 조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발견된, 저주받은 이단의 목을 조르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곧 위클리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화체설(transubstantiation)(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의 교리를 침범했다. 이런 '이상한' 의견은 파스차드 래드버트가 고안한 것으로 놀랄 만큼 대담하게 주장되어졌다. 위클리프는 1381년 옥스포드 대학 강의에서 이 교리를 공격하고 이것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때 옥스포드 대학 부총장이었던 바튼 박사는 대학의 수뇌들을 소집해서 위클리프의 교리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하겠다고 협박했다. 위클리프는 랭카스터 공작으로부터 더 이상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전에 그의 적이었으며 그때는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윌리엄 코트니 앞에 나오라는 소환 명령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대학의 한 구성원으로서 교황의 사법권에서는 면제되었다고 말했으며, 이 변호는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대학은 자신의 구성원을 지지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재판이 열렸고 최소한 그의 의견들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로 결정이 되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이 있다고, 어떤 사람들은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이 문제를 공표하자마자 위클리프가 즉시 답변했다. 대주교에게 부추김을 받은 왕은 '이단 선생' 즉 위클리프의 감금을 허락했으나 하원은 이러한 행동이 불법이므로 왕에게 취소하도록 했다. 그러나 대주교는 옥스포드 대학의 학장으로 하여금 위클리프가 쓴 모든 '이단' 교리들과 책들을 찾도록 지시하는, 왕으로부터 온 편지들을 입수했다. 그런 명령의 결과로 대학은 소란스럽게 되었다. 위클리프는 이 폭풍을 피해 외딴 곳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나 씨는 뿌려졌고 위클리프의 의견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어반은 교서를 공표해서, 종교를 높이 여기는 모든 사람들은 이 명분을 위해 싸우며, 거룩한 교황좌를 수호하고 클레멘트와 그의 지지자들을 대항하여 무기를 들라고 촉구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전쟁이 심하게 악용되었으며, 위클리프의 쇠퇴기에 그를 힘써 싸우도록 자극했다. 그는 다시 펜을 들어 가장 신랄하게 글을 썼다. 그는 매우 자유로운 방식으로 교황을 타이르고 대담하게 그에게 요구하기를 "어떻게 그가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상징을 (그것은 평화와 자비와 사랑의 상징인데) 두 명의 가짜 사제들의 사랑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하도록 이끄는 깃발로 사용하며 그리스도와 그의 사제들이 유대인들에게 압박 받았던 것보다 더 심하게 기독교계를 압박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가? 로마의 오만한 사제는 언제쯤 인류가 평화와 사랑 안에서 살도록 관대함을 보일 것인가?"라고 했다.
이런 심한 글은 어반의 분노를 일으켰으며, 그가 전에 겪었던 것보다 더 큰 고난들을 그에게 겪게 했다. 그러나 섭리적으로 그는 그들의 세력에서 구출되었다.
위클리프는 형벌과 비밀리에 갇혀 지냈던 곳에서 풀려나 루터워스의 그의 교구로 돌아갔다. 거기서 그는 그의 삶을 조용하게 끝마쳤으며 1384년 말에 주 안에서 평화로이 잠들었다.
후스와 제롬
교회의 권력을 강탈해 온 로마 성직자들의 횡포가 보헤미아에서는 특히 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A.D. 977년에 교황에게 시정을 요구하며 2명의 사역자와 4명의 형제들을 로마로 보냈다. 얼마 후 그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불평의 원인이 시정되었다. 특히 그들은 두 가지를 허락받았는데, 그들 자신의 언어로 예배를 드리는 것과 성사 때 평신도에게도 잔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논란들은 다시 재개되었다. 후임 교황들은 자신의 권력을 보헤미아인들에게 행사하고자 했고, 보헤미아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A.D. 1375년 복음에 열성적인 이들이 보헤미아의 찰스왕에게 교회 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 이유는 교회에 스며든 폐해들을 조사해서 완전한 개혁을 단행하자는 것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던 왕은 교황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침을 얻고자 했으나, 교황은 이 사건에 너무나 분개해서 도리어 "이 저돌적이고 악한 이단들을 엄히 처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따라서 그 군주는 이 사건에 연관된 모든 사람을 처벌했으며, 교황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사람들의 종교적 자유를 제한하는 수많은 부가적 조치를 취했다.
박해의 희생자들은 존 후스(John Huss)와 프래그의 제롬(Jerome)이 화형될 때까지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이 두 명의 탁월한 개혁가는 교황과 그의 사절들의 부추김으로 정죄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존 후스(John Huss)
존 후스는 보헤미아의 후센니츠라는 마을에서 1380년경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환경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그에게 최상의 교육을 해 주었다. 사립학교에서 고전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후 그는 프래그의 대학에서 지적 능력을 쌓았다.
1398년에 후스는 신학사(B.D.) 과정을 시작했으며, 후에 프래그에 있는 베들레헴 교회의 목사로, 대학 총장으로 지정되었다. 그 일을 그는 성실하게 수행했으며 마침내 설교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의 설교는 위클리프의 교리와 일치했기 때문에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주시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후스가 조금도 주저함 없이 그들을 맹렬히 비난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개혁주의자인 위클리프가 개혁에 불을 붙여서 교황권의 가장 어두운 부분과 무지에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의 교리는 보헤미아까지 퍼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수용하였다.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존 후스와 그의 열성적인 친구이며 동료 순교자인 프래그의 제롬이다.
개혁주의자들이 날마다 증가하는 것을 보고 프래그의 대주교는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확산되지 못하게 하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더욱 자극하여 그들이 오히려 이 교리를 널리 퍼뜨렸기 때문이다.
위클리프의 교리를 강력하게 수호했던 후스는 대주교의 칙령을 거부했다. 그러나 대주교는 마침내 교황의 교서를 얻어내었다. 그 교서로 대주교는 그 지역에서 위클리프의 교리들을 출판하지 못하도록 하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대주교는 또한 위클리프의 복사물들을 유포하지도 않았던 네 명의 박사들에게 소송을 일으켰으며, 그들의 특권에도 불구하고 회중에게 설교를 금했다. 후스 박사는 대학의 몇몇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이런 절차에 항거했고 대주교의 판결에 항소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교황에게 알려졌고, 교황은 콜로나 추기경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존 후스를 로마 법정에 직접 출두시켜서 그가 거짓과 이단을 설교했다고 고소하고, 후스로 하여금 그러한 고소에 대해 변호하게 했다. 그러나 후스는 직접 출두하지 않기를 원했으며, 또한 보헤미아에서 그를 크게 사랑했던 윈세스로스 왕과, 여왕, 귀족, 대학 당국은 교황이 그런 출두 명령을 철회해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또한 보헤미아가 이단이라는 고소를 받지 않기를 원했으며, 그들의 경배 장소에서 자유로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허용되기를 원했다.
세 명의 사무 변호인이 후스 박사 대신 콜로나 추기경 앞에 나왔다. 그들은 그가 출두하지 않은 것을 변호하고자 했으며, 후스 박사 대신 답변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그러나 추기경은 후스가 오만불손하다고 선언하고 그를 파문시켰다. 사무 변호인들은 교황에게 항소했고, 네 명의 추기경이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이 전 판결을 더욱 확증했을 뿐이며 후스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친구들과 추종자들까지도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부당한 판결에 후스는 위원회에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런 심한 판결을 받고, 프래그에 있는 그의 교회에서 추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고향인 후센니츠로 가서 그의 새로운 교리를 강단에서, 그리고 글로 계속해서 발표했다.
이 시기에 그가 쓴 글들은 상당히 많다. 프로테스탄트의 책들을 읽는 것은 절대적으로 금지될 수 없다는 논문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는 삼위일체에 관한 위클리프의 책을 변호하는 글을 썼으며 부패한 교황과 추기경들과 성직자들의 악행을 담대하게 말했다. 그는 또한 강력한 논쟁이 수록된 다른 많은 책들을 썼다. 이것은 그의 교리들이 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414년 11월 독일 콘스탄스에서 전체 위원회가 소집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외적으로 교황권에 맞선 3사람 사이에서 미결정된 논란을 결정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개혁의 진행을 짓밟고자 하는 것이었다.
존 후스는 이 위원회에 출두하도록 소환되었다.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황제는 그에게 안전 통행권을 보냈다. 후스가 여행 중에 사람들로부터 받은 찬사와 존경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리와 작은 길들에서조차도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줄지어 서 있었는데, 이는 호기심이기보다는 존경의 표시였다.
그는 큰 환호성과 함께 각 도시에 안내되었으며, 일종의 승리감 속에서 독일을 통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추방자였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나의 최악의 친구들이 보헤미아에 있음을 안다."
후스가 콘스탄스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유숙했다. 그가 도착한 지 얼마 후 스테판 팔레츠라는 사람이 왔다. 그는 후스에게 고의적인 박해를 가하기 위해 프래그의 성직자가 고용한 사람이었으며, 나중에 그는 로마법정에서 보낸 미카엘 드 카시스와 합류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그의 고소자로 자처하고 후스를 대적하여 일련의 조항들을 만들어 교황과 위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제출했다.
후스가 그 시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그는 곧 체포되어 궁정 관리에게 넘겨졌다. 이러한 일반 법과 정의의 위반에 대해 후스의 친구들 중 한 사람이 특히 주의를 기울여 군주의 안전 통행권을 요청했으나 교황은 이를 거부했고 군주의 안전 통행권도 거부되었다.
후스가 감금되어 있는 동안 위원회가 종교 재판관들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들은 위클리프의 교리들을 저주했으며 심지어 그의 유골을 파헤쳐 태워 재로 만들 것을 명령하기까지 했는데, 이러한 명령들은 쾌히 허가되었다. 그동안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귀족들은 후스를 위하여 강력하게 중재에 나서서 그를 정죄하지 못하게 했으나, 그를 재판하기 위해 임명된 위원들은 그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그가 위원회 앞에 섰을 때 그에게 고소된 조항들이 낭독되었는데, 40개 이상이나 되는 그 조항들은 주로 그의 저술들에서 발췌한 것이었다.
존 후스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교황에게 호소했으나, 그는 죽었고, 결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이 문제의 명분을 그의 후임자인 존 13세에게 호소하는 바이다. 나의 지지자들이 2년 정도 교황 앞에서 나의 명분을 변명할 기회를 허락해 주지 않았기에 나는 대재판장이신 그리스도께 호소하였다."
존 후스가 이 말을 마치자 그들은 그에게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였는지 여부를 물었고,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다시 그들은 그가 그리스도께 호소한 것이 합법적인지 물었고, 이에 존 후스는 답변하기를 "진실로 내가 여기 여러분 모두에게 확언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하는 호소보다 더 정의롭고 효과적인 호소는 없다. 그리스도보다 더 높은 재판관이 누구인가? 누가 이 문제를 더 정의롭고 더 공평하게 알고 판단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는 속임수도 없으며, 그는 속임을 받지도 않으신다. 누가 그분보다 비참하고 압제받는 자들을 더 잘 도울 수 있는가?"
존 후스가 경건하고 분명한 표정으로 이 말을 했을 때, 전체 위원회는 그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이런 훌륭한 말들은 반역의 말로 여겨졌고 그의 대적자들을 격분시켰다. 따라서 위원회에서 지정한 주교들이 그의 성직자복을 벗기고 그를 모욕하며 종이 주교관을 그의 머리에 씌웠다. 거기에는 마귀들이 그려져 있었고 "이단들의 주동자""고 쓰여 있었다. 그는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여 가시관을 쓰셨다. 그렇다면 비록 굴욕적이긴 하나 그를 위하여 내가 이 가벼운 관을 쓰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한가? 진정으로 나는 기꺼이 이것을 쓰겠다."라고 했다. 그의 머리에 이것이 씌워졌을 때 주교는 말하기를 "이제 우리는 너의 혼을 마귀에게 넘겨주노라."고 했다. 그러자 존 후스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서 "그러나, 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께서 대속하신 나의 영을 주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말했다.
화형대의 사슬에 묶였을 때, 그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여 이보다 더 심한 사슬에 묶이셨는데, 내가 왜 이 녹슨 사슬을 부끄러워하리요?"라고 했다.
장작이 그의 목까지 쌓였을 때 바바리아 공작은 그에게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라고 했다. 그러나 후스는 대답하기를 "나는 결코 악을 지향하는 교리를 설교한 적은 없다. 내가 내 입으로 가르쳤던 것을 이제는 나의 피로 인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사형 집행인에게 말했다. "당신은 거위 한 마리를 불사르려하고 있다. [보헤미아어로 후스(Huss)는 거위를 나타낸다.] 그러나 1세기 후에는 구울 수도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고 했다. 그가 미래를 예견한 것이라면, 그는 마틴 루터를 의미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약 100년 후에 빛을 발했으며, 백조를 문장으로 가지고 있었다.
불이 나무에 붙었고 우리의 순교자 후스는 크고 쾌활한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 그 소리가 나무들이 타는 소리를 뚫고 들리다가 마침내는 심한 불꽃에 가려 들리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재를 모두 모아서 라인 강에 뿌렸고, 지상에 그의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그에 대한 기억은 물로도, 불로도, 어떤 종류의 고문으로도 없앨 수 없으리라
프래그의 제롬에 대한 박해
존 후스 박사의 동료이며 같은 순교자인 이 개혁가는, 프래그에서 태어나 프래그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큰 학식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유럽의 다른 신학교들, 특히 파리대학, 하이델버그, 옥스포드 등을 방문하면서 그는 위클리프의 저작들을 알게 되었고 많은 책들을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했으며, 많은 노력 끝에 영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프래그에 돌아온 후 그는 자신이 위클리프에게 동조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의 교리들이 후스로 인해 보헤미아에서 상당히 발전했음을 알고 제롬은 이 위대한 개혁에서 후스를 돕기로 했다.
1415년 4월 4일 후스가 죽기 약 석달 전에 제롬은 비밀리에 콘스탄스로 갔다. 그가 도착한 사실이 알려지자 공의회는 그를 붙잡고자 했다. 그는 뒤로 물러서는 것이 현명함을 알고서 다음날 콘스탄스에서 약 1마일 떨어진 황제의 도시 아이버링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에게 안전통행권을 주면 공의회에 나가겠다는 서신을 황제에게 보냈으나 거부되었다. 공의회에도 같은 요청을 했으나 답변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는 힐소우에서 한 장교에게 체포되었다. 슐츠박 공작 하에 있던 그 장교는 공의회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럴 권한이 없는데도 그를 체포했다.
제롬을 손아귀에 쥔 슐츠박 공작은 지시사항을 얻기 위해 공의회에 편지를 보냈다. 공의회는 공작에게 감사를 표한 뒤 그를 즉시 콘스탄틴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제롬은 긴 사슬로 된 차꼬에 묶여 즉시 이송되어 무시무시한 지하감옥으로 옮겨졌다.
제롬은 후스가 당한 것과 거의 같은 대우를 받았다. 마침내 공의회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소인에 대해 변호할 기회를 요구했지만 거부되자 다음과 같이 외쳤다.
"얼마나 야만적인가! 나는 340일 동안 수많은 감옥에 감금되었다. 나는 모든 궁핍과 인색함을 경험했다. 나의 적들에게는 비난의 기회를 실컷 부여하고 내게는 최소한의 변호의 기회도 주지 않다니, 당신들은 내 재판에서 전혀 나를 준비시키지 않은 채 악랄한 중상을 한다. 당신들은 나의 교리를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이단으로, 내가 고백하는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를 믿음의 적으로, 사제들에 대한 나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한 채 나를 사제들의 박해자로 몰아붙였다. 이곳은 대공의회다. 이곳에 대해서 세상은 위엄과 지혜와 고결함을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당신들은 사람들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들은 외모에 치우치게 마련이다. 지혜가 있다고 자부할수록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더 주의해야 한다. 내가 변호하는 명분은 나 자신의 명분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명분이다. 이것은 후손들의 권리에 영향을 끼칠 명분이며 나 자신이 그 시험대 위에 있다."
이 연설은 전혀 효력이 없었으며, 제롬은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고소당했다.
1. 교황의 위엄을 조롱하는 자
2. 교황의 반대자
3. 추기경들의 적
4. 고위 성직자들의 박해자
5. 기독교를 증오하는 자.
제롬에 대한 재판은 그가 고소당한 삼일째에 열렸고, 그 고소에 동의하는 증인들이 증언했다. 죄수는 스스로 변호를 준비했다. 그가 340일 동안 음침한 감옥에 갇혀 빛으로부터 차단되고 생필품의 부족으로 아사 직전임을 감안해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정신만은 이 모든 불리한 조건들을 뛰어넘었다.
그 집단의 가장 완고한 자는 그의 변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다수에 의해 그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의 감동적이고 고양된 연설은 시작부터 고집센 마음을 녹이고 미신에 찌든 마음에 찔림을 주었다. 그는 사실에 기초한 증거와, 악의와 중상에 근거한 증거를 분명하게 구별지었다. 그 모임 앞에서 그는 자신의 생애와 행동의 전체행로를 보여 주었다. 그는 진리와 덕을 철회시키고자 하는 그의 적들에게 경멸을 표했다. 그는 후스를 극찬하고 순교자의 영광스러은 발자취를 따를 준비가 되었음을 선포하였으며, 위클리프의 변호할 만한 교리들을 언급하고서, 자신은 추호도 하나님의 교회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불평한 것은 성직자의 폐해와, 원래는 자선과 자비를 목적으로 했던 교회 재산이 사치스러운 의복과 눈의 만족에 사용된다는 사실이라고 말함으로 결론을 맺었다.
재판이 끝나자 제롬은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관례적으로 교황의 겉치레에 따라 시민의 세력으로 넘겨졌다. 그러나 그가 평신도였기 때문에 강등 의식은 하지 않았다. 빨간 마귀들이 그려진 종이 모자가 그의 머리에 씌워졌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가장 비참한 죄인이 죽어야 할 죽음을 겪으셨으며 가시관을 쓰셨다. 그분을 위해 나는 이 모자를 쓰겠다."라고 했다. 신앙을 철회할 2일 간의 기간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 기간 동안 프로렌스의 추기경이 그를 개종시키기 위해 최상의 노력을 했다. 그러나 제롬은 자신의 피로 자신의 교리를 인치기로 결심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사형장으로 가면서 그는 찬송가를 불렀으며, 후스가 화형당했던 바로 그 장소에 이르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는 쾌히 화형대에 묶였다. 장작에 불을 지피기 위해 사람들이 그 뒤에 왔을 때 그는 "오냐, 내 눈 앞에서 불을 붙여라. 내가 그것을 두려워했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이다."고 했다.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그가 부르는 찬송가는 이내 화염 소리에 가려졌다. 그의 마지막 말은 "화염 속의 이 혼을 주 그리스도께 바칩니다."였다.
프로렌스의 학식 있는 신사이며 교황의 비서이며 열성적이면서도 자유주의적인 카톨릭신자 포그는 레오나드 아로틴에게 쓴 편지에서 제롬을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했는데, 거기에는 제롬의 특이한 능력들과 덕에 대한 방대한 증거들이 있다.
# by | 2008/12/18 00:18 | 신앙열전 | 트랙백 | 덧글(0)



